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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케이크 안에 숨겨온 날카로운 칼

 

2022년 12월 9일부터 63빌딩 아트관에서 <맥스 달튼, 영화의 순간들> 전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올 10월 29일까지 예정된 이 전시의 메인 포스터는 영화 <그래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위 포스터를 작가가 다시 그린 것입니다. 선 하나도 대충 넘기지 않은 듯 한 작가의 섬세한 터치와 스토리가 녹아있는 아기자기한 디테일들은 그림 앞에 한참을 서 있게 만듭니다. 환상이 아닐까 싶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저 핑크색 호텔은 영화를 본 지 오래되어 기억이 흐릿하거나 비슷한 콘셉트의 광고만 보았을 뿐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저 사랑스러운 색감만 보고 왠지 이 영화가 사랑스럽고 달콤한 영화일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잔인한 장면을 한 번도 드러내놓고 보여주지 않으나 꽤나 잔인한 영화입니다. 사실 유혈이 낭자한 <킬빌>과 같은 영화도 아니기에 이 영화가 잔인하다고 하는 평은 전체적으로 달콤한 분위기를 생각할 때 지나치게 유난스러운 평인지도 모릅니다. 

 

No Crying. 지난 포스팅이었던 <프렌치 디스패치>의 편집장의 방에 써있었던 문구입니다. 웨스 앤더슨 영화의 잔인함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이 영화에서는 꽤 많은 사람이 죽는데, 그 누구도 죽은 사람을 위해 울지 않습니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들이 잘 어우러지도록 소품 하나하나까지 깔끔하게 배열된 모든 화면들은 어느 한 장면을 캡처하더라도 하나의 작품처럼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이 웨스 앤더슨을 좋아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완벽하게 배열된 아름다운 화면과 지극하게 절제된 배우들의 감정. 움직이는 영화지만 마치 회화를 보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드는 영화입니다. 

 

그럼에도 따뜻하고, 마음이 포근한

 

감옥에서 탈옥한 무슈 구스타브가 제로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구스타브 : 변장을 하자

제로 : 하고 있잖아요.

구스타브 : 아냐. 가짜 수염이랑 코를 가져오랬잖아.

제로 : 수염 기르시는 줄 알았죠. 변장하면 어색해 보이지 않겠어요?

구스타브 : 아냐. 제대로 하면 그럴싸해. 하지만 네 말도 일리는 있어. 파나쉬 향수 좀 뿌려줄래? 몇 방울만 좀 뿌려줘.

제로 : 깜박했어요.

구스타브 : 향수도 안 가져왔단 말야? 어이없네, 어떻게 그걸 잊어? 나 감옥에서 막 나왔잖아. 상태가 어떻겠어? 몸냄새가 장난 아니라고. 진짜 기가 막힌다. 네 고향에선 괜찮겠지만, 어디서 왔댔지? 아크 살림 알 자밧에선 흔한 일이겠지. 거기 사람들은 더러운 카펫 깔고 굶주린 염소랑 천막에서 지내면서 산나물 캐 먹겠지만 난 널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어. 대체 왜, 고향을 등지고 무일푼으로 이 머나먼 문명세계에 와서 밑바닥 이민자로 사는 거야? 여긴 너 없어도 잘만 굴러가는데!

제로 : 전쟁이요.

구스타브 : 뭐라고?

제로 : 아버지는 살해됐고, 나머지 가족은 총살 당했어요. 마을은 불탔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망쳤죠. 전쟁 때문에 고향을 떠났어요. 

구스타브 : 그럼 이민자라기 보다는 난민인 거네?

제로 : 그렇죠.

구스타브 : 그렇담 방금 내가 한 말 다 취소할게. 내가 바보였어. 한심한 멍청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역겹고도 사랑스러운 인물은 무슈 구스타브입니다. 인간적인 오점과 이상적인 매너를 가진 상사. 탈옥하고 빨리 도망쳐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변장을 못하는 것보다 향수를 뿌리지 못하는 것에 더 화가 나는 사람. 향수를 뿌리지 못해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서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조곤조곤 상대를 지르밟는 우아함. 그러나 그 지르밟은 상대의 아픔과 안타까운 사연을 마주하자마자 자신의 잘못을 바로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대인배. 

구스타브의 죽음 역시 자신의 벨보이, 제로를 구하기 위해 거침없이 몸을 던진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제로는 구스타브의 죽음에 눈물 흘리지 않습니다. 그의 대부분의 스토리는 구스타브에 대한 것이었으나, 그의 눈물은 아가사를 위해서만 흐릅니다. 그의 삶을 '환상'이라는 칭하는 것 역시 은연 중의 조롱으로 읽힙니다. 늙은 여인을 '비계'라 칭하는 비루함과 자신의 목숨이 백척간두에 있는 상황에서도 먼저 간 동료를 위해 묵념을 하는 우아함을 함께 가진 인물들이 웨스 앤더슨 영화에는 많습니다. 때문에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꽤 허망한 기분이 듭니다. 그럼에도 그 말랑한 아름다운 장면들 때문에 다시 영화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교훈도, 감동도 주지 않는 영화지만 그런 게 사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며, 그토록 정성 들여 만든 영화의 장면들처럼 한 순간에 흐드러져 버리더라도 내가 소중히 할 무언가를 찾아야만 할 것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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