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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색감과 작화가 매력적인 애니메이션

 

사실 이 영화를 어디서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앞의 <러빙 빈센트>를 포스팅하다, 제가 살아가면서 사람을 어떤 자세로 바라보아야 할지 가르쳐준 영화가 내게 있었다는 것이 떠올라 연이어 적게 되었습니다. 

 

포스팅을 위해 검색을 해보니 이 영화는 우리나라 영화관에서 개봉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EBS에서 방영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독특한 색감의 이 애니메이션에 시선을 뺏겨 보기 시작했을 겁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마을을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보니 보통의 만화에서 보지 못한 강렬한 색감과 무슨 기법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치 회화작품 같은 독특한 작화가 담긴 장면들에 마음을 뺴앗겼었습니다 마치 종이를 오려 붙인 것 같은 느낌의 숲이나 나무를 보여주어 공간의 느낌을 입체감 있게 살렸는데 매력적입니다. 

 

이 영화는 아프리카가 배경이지만, 등장인물들은 프랑스어를 씁니다.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 합작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흑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백인들이 만들었다는 것이 어리둥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특별히 비하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지는 않아 보기에 불편함은 없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처럼 영민하고 신기한 능력을 가진 '키리쿠'가 등장하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드는 영화입니다. 

 

1998년에 만들어진 데다 인터넷에도 특별히 사진자료가 많지 않아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Wavve에서 찾았습니다. 정말 요즘 OTT에서는 보려고만 하면 못 보는 영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영화관이 설 자리가 없어져서 설마 영화시장이 위험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도, 보고 싶은 영화를 쉽게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은 사실 또 행복한 일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자세

 

30대 후반의 되어 거의 20년 만에 다시 본 영화의 스토리는 사실 꽤 엉성했습니다. 신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이다 보니 사실 스토리에 개연성은 없습니다. 

 

키리쿠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말을 합니다. 어머니는 거기에 '전혀' 놀라지 않고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는 아이는 스스로 태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키리쿠는 스스로 기어 나와 탯줄을 자릅니다. 출생부터 범상치 않은 이 아이는 엄청나게 작습니다. 성인 한 발 크기 정도나 할까요. 대신 축지법을 쓰는 것처럼 엄청나게 빠른 발과 영리한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키리쿠가 사는 마을에는 '카라바'라는 마녀가 살고 있는데, 그녀는 마을의 샘을 말리고, 마을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으며, 마을의 모든 남자들을 잡아 죽였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마녀를 두려워하고, 마녀가 집에 불을 질러도 항의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눈물만 흘립니다. 마녀가 마을아이들을 납치하려고 할 때마다 키리쿠가 나타나 마녀의 계획을 무산시킵니다.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키리쿠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 하지만 여전히 너무나도 작은 키리쿠를 무시하고 괴롭힙니다. 키리쿠는 사람들에게 계속 묻습니다. "마녀는 왜 나쁘죠?"

 

사람들은 그저 마녀니까 나쁜 거라고 합니다. 키리쿠는 그 답을 찾기 위해 금지된 산의 할아버지를 찾아갑니다. 정말 산 넘고 물 건너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 와중에 생명을 살리며, 할아버지를 만납니다. 키리쿠는 할아버지에게 다시 묻습니다. "마녀는 왜 나쁘죠?" 할아버지는 누군가 과거 마녀의 등에 독침을 막았고, 마녀는 그 독침으로 인해 마법이 생겼지만, 매 순간 고통스럽고 아파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독침을 제거할 때 너무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독침을 빼내다 마녀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키리코는 망설이지 않고 마녀에게 가 독침을 제거합니다.

 

독침을 제거하기 전에 마녀는 걸어가는 길마다 죽음이 가득하고,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키리쿠가 독침을 빼주니 마녀의 얼굴이 예뻐지고, 발걸음마다 꽃이 피어나게 됩니다. 키리쿠는 마녀에게 청혼을 합니다. 마녀는 네가 너무 작고 어려서 안 된다고 거절하지만, 그럼 입맞춤만 해달라고 하여 허락하자, 키리쿠는 순식간에 성인이 되고, 둘은 짝이 되어 마을로 돌아갑니다. 

 

마녀가 마을로 돌아가자 마법이 없어져 약해진 마녀를 마을사람들은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자신들의 남편과 형제를 죽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키리쿠의 할아버지가 사라졌던 마을 남자들과 함께 나타나 마을의 남자들은 사실 마법에 의해 기계병정으로 변해있었을 뿐 죽었던 것은 아니고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고 알려줍니다. 오해가 풀린 마을은 축제를 열고 끝이 납니다. 

 

이 영화를 몇 살 때 보았는지도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나가다 한 번 본 영화를 지금도 기억할 만큼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어릴 때 저에게 선과 악은 분명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었을 뿐,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키리쿠는 계속 묻습니다. 마녀는 '왜' 나쁘냐고. 영화는 그 물음으로 그 선과 악의 경계를 깨부쉈습니다. 선하고 약하다고 생각한 것도 악한 면을 가지고 있고, 악하고 강하다고만 생각한 것도 다시 들여다보면 선해질 수 있다는 것.

 

어느 영화배우가 악역을 할 때 그 악인에게 왜 나빠졌는지 사연을 주는 것을 거부한다는 인터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악이 왜 악하게 되었는지, 악인을 이해하게 되고 동정하게 되면, 그 악한 행위에 정당성이 부여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영화를 보고 누군가가 악한 행위를 모방하거나 하는 일이 생겼을 때 변명거리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런 불쌍한 성장시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악인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 불우한 환경을 가졌다고 해서 악인이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마을사람들도, 마녀도, 키리쿠와 할아버지가 선의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악을 그저 미워만 하지 않고, 이해하고 감쌈으로써 선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 사실 그러나 30대 후반이 된 저는 악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보다는 깔끔하고 살벌하게 응징하는 스토리를 더 좋아하긴 합니다. 당한 게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직 덜 자란 어른으로써 다시 한번, 사람의 이면을 생각하게 하고, 이해하게 되었던 그 마음을 다시 되새겨 보려고 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앞둔 연말. 그렇게 조금 더 어른이 되어야 함을 생각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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